번아웃 — 열심히 하다 꺼지는 방식

번아웃 — 열심히 하다 꺼지는 방식
휴대폰 배터리를 생각해 보자. 100%로 시작해서 하루 쓰면 20%가 된다. 그런데 밤에 충전을 안 하고 다음 날도 쓰고, 그다음 날도 쓴다. 어느 날 아침, 켜지지 않는다.
번아웃은 딱 이거다. 사람이 안 켜지는 상태.
게으른 사람한테는 잘 안 온다. 이게 이상한 지점이다. 번아웃은 열심히 한 사람한테 온다. 매일 늦게까지 코드를 짜던 개발자, 밤새 그림을 고치던 디자이너, 마감을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날 노트북을 열고 그냥 화면만 본다.
세계보건기구가 뭐라고 했나
세계보건기구(WHO)라는 곳이 있다. 전 세계 건강 문제를 다루는 큰 기관이다. 여기서 만든 질병 목록을 ICD-11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번아웃이 들어가 있다. 다만 "병"으로 넣은 건 아니고, 일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적어 놨다. 정확히는 이렇게 설명한다. 직장에서 오래 쌓인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했을 때 생기는 것.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두 개다. 오래, 그리고 못 풀었을 때.
하루 야근했다고 번아웃이 오진 않는다. 물 한 컵 쏟았다고 방이 잠기지 않는 것처럼. 문제는 수도꼭지가 몇 달째 조금씩 새고 있는데 아무도 안 잠근 경우다.
증상 세 가지
WHO는 신호를 세 개로 정리했다. 하나씩 보자.
첫째, 에너지가 바닥난다. 자도 안 풀린다. 주말에 12시간을 자고 일어나도 몸이 무겁다. 배터리가 100%로 안 차고 40%에서 멈추는 느낌.
둘째, 일에서 마음이 멀어진다. 예전엔 재밌던 일이 남의 일 같다. 회의 중에 "이걸 왜 하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좋아하던 게임을 억지로 하는 기분과 비슷하다.
셋째, 잘 못 해낸다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실력이 떨어진 게 아닌데도 그렇다. 예전에 30분이면 하던 걸 세 시간째 붙잡고 있다. 그러면 "나 원래 못하는 애였나" 싶어진다.

작업실에서는 이렇게 보인다
말로만 하면 잘 안 와닿는다. 실제 장면으로 보자.
어떤 개발자가 있다. 버그 하나를 고치는 데 원래 20분이면 됐다. 그런데 오늘은 두 시간째다. 코드는 눈에 들어오는데 머리에 안 들어온다. 같은 줄을 여덟 번 읽었다. 결국 창을 닫고 유튜브를 켠다. 그러고 죄책감이 든다. 그 죄책감 때문에 또 못 쉰다.
디자이너 쪽도 비슷하다. 시안을 다섯 개 만들어야 하는데 하나도 못 만든다. 손이 안 움직이는 게 아니라, 뭘 만들고 싶은지가 안 떠오른다. 예전엔 머릿속에 그림이 먼저 있었다. 지금은 흰 화면만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하는 실수가 있다. 더 열심히 한다.
이게 제일 위험하다. 배터리가 3%인데 밝기를 최대로 올리는 것과 같다. 잠깐 화면은 밝아진다. 그리고 더 빨리 꺼진다.
왜 스스로 못 알아차릴까
번아웃은 감기처럼 오지 않는다. 감기는 어제 멀쩡했다가 오늘 열이 난다. 티가 확 난다.
번아웃은 물이 끓는 것과 비슷하다. 냄비 안 물은 1도씩 올라간다. 20도, 21도, 22도. 안에 있으면 차이를 못 느낀다. 끓고 나서야 안다.
게다가 방향을 헷갈리기 쉽다. "일이 힘들어서 지친 것"인데,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으로 읽는다. 원인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는다. 그래서 해결책도 "더 노력하자"가 된다. 정확히 반대 방향이다.
일이 사람을 어디까지 밀어붙이나
번아웃은 기분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래 일하는 것 자체가 몸에 부담을 준다. WHO와 국제노동기구가 같이 조사한 자료가 있는데,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사망을 나라별로 정리한 것이다.
일본에는 이걸 가리키는 단어가 아예 따로 있다. 과로사(카로시). 너무 일해서 죽는다는 뜻이다. 단어가 생겼다는 건, 그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다는 뜻이다.

겁주려고 꺼낸 얘기는 아니다. 다만 "좀 무리해도 괜찮다"는 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알아 두는 게 좋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WHO의 정의를 다시 보면 힌트가 있다.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스트레스라고 했다. 스트레스가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게 문제라는 뜻이다.
1. 끄는 시간을 정한다. 밤 10시 이후엔 작업 파일을 안 연다, 같은 식으로. 애매하게 "적당히 쉬자"는 안 지켜진다. 숫자로 정해야 지켜진다.
2. 다 끝내고 쉬려고 하지 않는다. 일은 절대 다 안 끝난다. 끝나면 쉬는 게 아니라, 정해진 때에 쉬는 거다.
3. 일 아닌 걸 하나 갖는다. 잘할 필요 없는 일. 못 그려도 되는 그림, 느리게 걷는 산책 같은 것. 평가받지 않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4. 말한다. 혼자 참으면 아무도 모른다. 팀장한테, 친구한테, 가족한테. "요즘 좀 벅차다"는 한마디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꾼다.
5. 오래가면 도움을 받는다. 몇 달째 그대로면 그건 의지 문제가 아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정신력으로 걸으려는 것과 같다. 전문가한테 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번아웃이 왔다는 건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계속 달렸다는 증거에 가깝다.
달리기 선수도 결승선까지 전력으로만 뛰지 않는다. 힘을 나눠 쓴다. 그게 요령이지 게으름이 아니다.
배터리는 충전하면 다시 100%가 된다. 다만 방전된 채로 오래 두면 배터리 자체가 망가진다. 그전에 꽂아 두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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